Works

생성의 창, 알루미늄패널에 유채, Ø 200cm, 2026,

Press release

1. 전시 제목 《줄타기 인간》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줄타기 인간》은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에 등장하는 줄을 타는 곡예사에서 착안한 제목입니다. 니체에게 줄은 인간과 초인을 잇는 경계이자,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존재의 조건을 상징합니다. 저는 이 상징을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으로 확장해 해석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줄은 단순한 균형이나 위험의 은유보다는 불확실한 세계 속에서 자신의 사유와 존재를 지속적으로 갱신하는 과정입니다. 작품 속 인물들은 목적지에 도달한 존재가 아니라, 흔들림과 긴장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 자체를 드러냅니다. 따라서 《줄타기 인간》은 자신의 한계와 마주하며 끝없이 건너가는 존재, 그리고 그 과정 자체를 살아가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2. 원형의 지지체로 구성된 회화 연작과 ‘구름’은 어떤 관계인가요? 모종의 장소로서, 사유의 배경이 되는 지점을 자연물에서 찾아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원형의 지지체와 구름은 모두 하나의 ‘장소’를 가리키지만, 물리적인 장소가 아니라 사유가 발생하는 공간을 의미합니다. 저에게 구름은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존재입니다. 형태를 계속해서 변화해 나가는 구름의 운동성은 인간의 사고와 닮아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 또한 구름처럼 하나의 결론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흔들리고 갱신되기 때문입니다. 원형의 지지체는 이러한 구름의 성격을 담아내기 위해 고안한 형식입니다. 기존 캔버스가 지닌 사각의 화면이 외부 세계를 바라보는 ‘창’이라면, 원은 시작과 끝이 없는 순환과 운동을 상징하는 형태입니다. 저는 그러한 원형의 화면을 하나의 풍경이나 대상을 재현하는 공간을 넘어서, 사유가 일어나는 장(場)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구름은 인간의 사고가 움직이는 방식에 대한 은유이고, 원형의 지지체는 그 사유가 펼쳐지는 무대입니다. 저의 관심은 자연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자연의 변화하는 ‘운동’을 주목하며 인간 존재와 사유의 구조를 바라보는 데 있습니다.



3. 이번 전시는 제목에서도 암시되듯 특히 곡예사의 몸짓이나 행동을 경유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곡예사를 참조 삼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곡예사는 저에게 인간 존재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은유입니다. 곡예사는 언제나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불안정을 몸으로 견디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저는 이러한 모습이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줄타기 인간’은 제 작업의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책 속에서 줄 위를 걷는 사람의 행위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기술에 머무르지 않고, 매 순간 균형을 잃고 다시 회복하는 반복의 과정으로 비추어집니다. 그래서 제 작품 속 곡예사는 특정 인물을 재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으며, 오히려 인간 존재의 상태 그 자체를 드러내는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원, 줄, 구름 역시 모두 이러한 몸짓과 연결됩니다. 원은 인간이 감당해야 하는 무게이자 사유의 공간이고, 줄은 존재의 경계, 구름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고의 운동입니다. 곡예사는 이 모든 요소 사이에서 자신의 몸으로 균형을 만들어 갑니다. 즉, 제가 곡예사를 참조한 이유는 인간을 흔들림을 피하지 않고 그 안에서 자신을 만들어가는 존재로 바라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4. 유채에 기반한 원형 회화는 작품의 제목을 통해, 수채와 드로잉 재료에 기반한 소형 회화는 형태를 통해 곡예사를 지시합니다. 그런 한편, 전자의 표현 방식과 후자의 작품 제목은 추상적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두 연작은 어떻게 다른가요?

 

두 연작은 같은 주제를 다루지만, 서로 다른 방향에서 접근합니다. 원형의 유채 회화는 곡예사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대신 구름과 원형의 화면을 통해 곡예사가 존재하는 방식과 그가 지니는 사유의 공간을 다룹니다. 따라서 작품의 제목을 관람자가 회화를 읽는 단서가 되도록 지었습니다. 화면은 비교적 추상적이지만, 제목을 통해 곡예사의 몸짓이 하나의 철학적 상태로 연결되도록 의도한 것입니다.

반면, 소형 회화는 곡예사처럼 보이는 형태를 통해 그의 신체 능력과 철학적 태도를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냅니다. 이 인물은 니체라는 철학자의 외형을 빌린 것인데요. 몸을 휘어 균형을 잡으며 원의 굴곡을 견디는 동작을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삶에 대해 지닌 긴장, 의지, 태도를 시각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두 연작이 곡예사를 ‘매개’하는 각각의 방식을 통해 서로를 보완한다고 생각합니다.



5. 이번 작품들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밝히셨습니다. 니체의 실존주의 철학을 2020년대에 소환함으로써,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저는 니체를 현재의 문제를 설명하는 철학자로 읽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과정에 있는 존재로서 인간에 관한 니체에 독해는 불확실성과 변화가 일상이 된 오늘날에 더욱 유효합니다. 202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수많은 정보와 기준 속에서 끝없이 선택하고, 자신의 위치를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안정된 정답이나 정해진 진리를 찾기보다,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스스로의 균형을 만들어 가는 일이 과거보다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중심 대상으로 선택한 곡예사는 무언가를 해내는 특별한 영웅이 아니라, 흔들림 속에서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관객에게 특정한 철학적 결론을 전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작품 앞에서 자신의 삶과 겹쳐 볼 수 있는 하나의 질문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인간은 완성된 존재일 수 없고 언제나 자신을 갱신하는 과정에 있는 존재라면, 우리는 지금 어떤 줄 위를 걷고 있으며 무엇을 넘어가고 있는가. 저는 그 질문이 니체가 19세기에 던졌던 물음인 동시에, 오늘날에도 유의미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6. 과거 작품과 달리 새롭게 시도한 조형적 방법론은 무엇인가요? 앞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작품의 방향성이 있다면 덧붙여 주세요.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주로 자연의 형상을 바라보던 관점에서 인간의 몸으로 사유의 중심을 이동시켰다는 것입니다. 이전 작업에서는 구름에 집중해 변화와 생성의 원리를 탐구했다면, 이번에는 그 변화를 감당하는 인간의 몸과 존재의 조건에 주목했습니다. 조형적으로는 원형의 지지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원형은 전통적인 사각 화면과 달리 방향성과 위계가 약한 구조를 지니며, 순환과 반복, 운동의 감각을 담아낼 수 있는 형식입니다. 또한 원형 회화와 더불어 수채와 드로잉으로 인간의 몸짓을 표현한 작품을 병치하면서, 추상적인 사유의 공간과 구체적인 신체의 긴장이 하나의 전시 안에 교차하도록 구성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철학, 과학, 예술 등 서로 다른 분야처럼 보이는 두 사유를 토대로 인간은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가라는 하나의 질문이, 저에게는 점점 더 중요해졌습니다. 앞으로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표현하기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세계를 배우고 탐구하는 과정에 정진하며, 그 결과를 누구나 직관적으로 마주하고 사유할 수 있는 형태로 제시하고 싶습니다. 관객이 작품을 통해 하나의 정답을 얻기보다 새로운 질문을 발견하고, 자신만의 해석을 만들어갈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앞으로도 제가 발전시켜 나가고 싶은 작업의 방향입니다.